창세기 4,4-9
4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6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9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묵상
주님께서 카인의 재물을 굽어보지 않으신 이유는 없다. 카인의 인격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아벨의 제물을 굽어보신 이유도 없다. 아벨을 더 아껴서가 아니다. 욥기는 이 주제를 더 열어 젖힌 이야기같다. 따지려 들면 불합리한 것이 세상의 일이다. 설명을 치운다면 운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신념과 사상이 길을 내어준다. 주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다.
전쟁상황과 관련하여 폴란드와 중동지역에서 한국방산무기의 평가와 경제적 이익에 대한 기사가 넘친다. 그리고 전쟁의 비인간성과 장기화에 대한 우려가 다른 면에 실린다. 그렇구나, 한 지면에서 다른 지면을 바라보면 물과 기름같이 경계가 생긴다. 내가 느끼는 혼란에서 상식과 신념의 단편성을 확인한다. 원죄를 최초의 살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족해 보인다. 카인은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는 자기 행위와 모순된 목소리 듣는다. 세상의 혼란과 주님을 인식하는 구조가 원죄를 구성한다. 인간 인식의 한계와 절대자의 출현은 욥기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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